사유의 깊이와 시의 깊이
- 박후식의 시세계-
이근배
(시인. 재능대 교수)
1.
문학은 사유의 산물이다. 곡식을 거두기 위해서는 농토가 있어야 하고 제품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공장을 지어야 하지만, 시인이 한 편의 시를 낳는 데는 오직 사유의 천착(穿鑿)이 있어야 한다. 사물의 겉보기만으로는 시가 되지 않는다. 누구도 바라본 적이 없는 내포성을 시인은 생각의 송곳에 날을 세워 뚫고 들어가 캐내야 한다. 광부가 땅속 깊이 막장에 내려가서 석탄을 캐듯 누구도 정을 대지 않은 언어의 막장에서 몇 억년 잠든 언어를 캐내야 한다.
박후식 시인은 1978년 내가 발행하던 <한국문학>의 시부문 신인상에 당선되어 시단에 신선한 바람을 일으킨 시인이다. 그 당시만 해도 월간 문학지는 3,4종 밖에 없었던 때였고, <한국문학>은 많은 독자를 가지고 있던 터라 문학신인들이 가장 오르고 싶었던 등용문의 하나였다.
따라서 응모의 열기가 뜨거웠던 만큼 아주 엄정한 심사를 거쳐 시부문도 한해에 한두명의 신인만을 당선시켰다. 그 무렵 본선에서 탈락한 응모자들 중에는 그 후 신춘문예 등을 통해 등단해서 오늘의 시단에 중진으로 활약하고 있는 시인들도 있으며, 오히려 당시의 낙방을 자랑스럽게 회고하기도 한다. (중략)
박후식 시인은 지극히 일상적인 풍경들을 내면의 세계에서 재구성하여 시로 생산한다. 그렇게 생산된 시들은 하나 같이 정신의 영롱한 유약으로 구워지면서 폭넓은 감동을 안겨주게 된다.
그로부터 여러 겹의 세월을 넘어 어느새 박후식 시인이 고희에 다다르고 있다. 아마 이 시집도 그런 개인사적인 이유와 맞닿는 작업의 하나로 묶어지는 것이 아닌가도 생각되고, 굳이 시에 눈이 어두운 나에게 이 글을 쓰게 한 것도 등단시의 연고를 생각한 때문이 아닌가 싶다. 아무튼 연륜과 더불어 더 깊어지고 넓어진 그의 사유가 이뤄낸 시세계를 살펴 읽을 기회를 얻게 된 것은 나로서는 좋은 글공부가 되는 일이기도 할다.
2.
생각의 열매는 오래 익힐수록 그 빛깔과 향기를 더해간다. 박후식 시인은 어느 한 순간도 글감을 찾고 깎고 다듬는 생각의 밭을 갈지 않을 때가 없었겠으나, 교육의 일선에서 맡은 역할을 책임있게 해내느라 시단의 중심에서 활발하게 시작을 발표하는 일에는 뒤쳐질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그의 사유가 녹슬거나 시적 감성이 물러지지 않았음을, 아니 더욱 치밀해지고 자기만의 세계를 확장해 갔음을 이 시집에서 증거하고 있다.
너 앞에 앉으면 바람이 분다
가슴 깊은 데까지 스며와 샘을 만든다
소나무 가지가 길게 내려와서
더 아름다운 곳
돛배 하나 억새꽃 꺾어간다
다산도
함께 간다
-<강진만> 전문
산은 깊었다
깊은 산을 따라 강물은 굽이돌고 있었다
누군가 강가 모래톱에
수의를 벗어두고
흐르는 강물에 핏몸을 태우던가
사람은 가고 정적만 남았는데
숨겨둔 아픔 다 끌어내어
노을은 선돌 위에 저리 불타는가
(하략)
-<청령포>에서
저 조선왕조의 서릿발 정치는 우리 국토의 곳곳에 유배지를 앉혔다. 그 많은 가운데서도 나는 단종이 왕위를 찬탈당하고 쫓겨갔다가 사약마저 받았던 영월의 깎아지른 육봉산 기슭의 청령포와 다산 정약용이 열여덟 해 묶여 살면서 거대한 다산학을 완성시킨 강진만이 굽어보이는 만덕산 기슭의 귤동, 그리고 추사 김정희가 아홉 해 위리안치(圍籬安置)로 갇혀 있으면서 추사체(秋史體)라는 서예예술의 새 경지를 이뤄낸 제주도 남쪽 대성 마을을 잊지 못한다.
두세 차례씩 찾아가서 발버둥을 치면서 겨우 시라고 얽어내기는 했으나 내세울 것이 못된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우선 강진만, 청령포가 나를 괄목(刮目)게 한다. 역사의 현장에서 글감을 찾는다면 대체로 기행문이 되거나 아니더라도 사실(史實)이나 인물묘사에 치중하기 쉬운데 이 시인은 거두절미하고 덤벼든다. "너 앞에 앉으면 바람이 분다"로 달려들어 "돛배 하나 억새꽃 꺾어간다"까지 글자 하나 행간 하나 비집고 들어설 틈 없이 천의무봉(天衣無縫)이다. 그리고 다시 "다산도/ 함께 간다"로 시가 강진만의 수평선을 넘어 끝없는 망망대해에 돛을 올리는 것이다. 무엇이 이토록 시를 충만하게 부풀렸을까. 오로지 깊고 깊은 사유의 천착이었다. 이 한 편으로 박후식 시인은 시인으로서의 몫을 다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청령포]에서는 아예 어린 단종의 통곡, 역사의 뒤틀림을 겉에 들어내지 않는다. 그러나 속 깊이 감춘 말이 더 가슴에 비수로 박힌다. "누군가 강가 모래톱에 수의를 벗어두고/ 흐르는 강물에 핏몸을 태우던가" 라든지 "물 건너 모래톱이 바로 저긴데/ 가느다란 뱃길 하나 왜 저리 멀까" 같은 대목은 굳이 실명을 내세워 익히 알려진 사실을 적시하지 않아도 거세고 긴 파장으로 마음에 와 닿음이야 어쩌랴.
이 밖에도 [마이산] [도솔암 기행] [백양사 쌍계루] 등 유적지를 돌며 캐온 시의 풀뿌리들도 하나 같이 시간과 공간을 넘어 지지 않는 새 빛깔의 꽃을 피워내고 있다.
3.
나는 미당(未堂)의 시를 읽고 배웠다. 요즘 정치권에서 들먹이는 과거사 바람이 문학 쪽에도 불어와 미당의 전력 때문에 시마저도 외면당하고 있음은 우리 문학의 불행일뿐더러 매우 안타깝기 그지없는 일이다. 잘못된 일을 덮거나 옹호하자는 것이 아니라 우리 시문학사에 미당 만큼 시의 절정을 이룬 이가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서 왜 미당이냐고 반문하시겠지만, 반갑게도 박후식 시인의 시 <미당 생각>을 읽으면서 "아하 그렇구나" 하고 고개가 끄덕여진 까닭이다. "그렇구나"는 다름 아닌 이 시인도 나처럼 미당시를 읽고 그 시편들을 훔쳐보면서 시를 익혀갔으리라는 것이다. 황동규가 미당선생 팔순잔치에 일어서서 "미당시를 읽지 않고 시를 쓴 자 나서봐라!"고 외쳤던 것과도 맥을 같이 하는 일이다. 우리의 모국어는 미당에 의해서 그 아름다움의 묘미를 얻었고, 후학들은 직간접으로 미당이 뿌린 모국어의 모이를 쪼으며 성장한 것이다.
남도 뻐꾹 소리
난 치듯 그리시더니
산색 고운 모국어
망태기에 담으시더니
산 찾아
가시는가
모진 할미 정이
지리산
외진 산감처럼 떫고 깊어
봉산산방(蓬蒜山房)마저 그리 차시던가
(하략)
-<미당 생각>에서
쏙 빼닮았다. 미당의 생각, 미당의 어법이 여기 와서 되살아난다. 나도 미당을 그려봤지만 어림없었다. 미당을 두고 쓴 시도 그리 많지 않거니와 이만큼 필적(匹敵)하는 시도 여지껏 만나지 못했다. "남도 뻐꾹 소리/ 난 치듯 그리시더니"만 해도 미당도 미처 찾아 쓰지 못했던 말을 용케도 솎아내서 서울 관악구 남현동 다 허물어져가는 봉산산방(미당댁 택호)의 박넝쿨로 올린다. '모진 할미 정이/ 지리산/ 외진 산감처럼 떫고 깊어'도 또 다른 미당의 얼굴, 미당의 말투가 아닌가. 물론 이것은 시 쓰기가 모자라서 미당으로 매우는 것이 아니다. 우리 모국어의 가장 깊은 골짜기에 들어가서 미당이 다하지 못하고 갔던 것 그가 쌓아놓은 돌탑 위에 돌 하나를 더 얹는 일이며, 이 땅에 시를 씨 뿌린 스승에게 바치는 곡진한 마음의 헌시이다.
산길을 가다보면
돌 끝에도
햇빛 앙금이 묻어 있다
누가
보냈을까
산골 할머니가 밭고랑 끄트머리에서
자꾸 흘러내리는 햇빛을 고랑 위로 끌어올리고 있다
할머니다
돌멩이처럼 작아지고 있다
-<일몰> 전문
날마다 해는 진다. 사람들은 지는 해를 보며 하루를 되돌아보기도 하고 혹은 한 생애를 거슬러 보기도 한다. 시인들은 참 많이도 저녘노을을 쓰지만 흔하게는 노을의 풍광이나 정서적 감응으로 물감을 풀기가 일쑤다. 그런데 이 시는 기각(視覺)부터가 딴판이다. "일몰"을 정면으로 부딪치는 것이 아니라 그 배경으로 또 다른 "일몰"을 낳고 있는 것이다. "산길을 가다보면/ 돌 끝에도/ 햇빛 앙금이 묻어 있다"에서 우선 새롭게 깎아내는 시어가 눈에 띈다. "돌 끝" "햇빛 앙금"이 그것이다. 시가 말의 예술이라고 흔히 말하지만 이름난 시인들의 시에서도 새맛을 내는 시어를 찾기가 쉽지 않다. 따라서 "돌 끝에도 햇빛 앙금이 묻어 있다"로 "일몰"은 벌써 산새처럼 내려와 우리 앞에 날개를 접고 있다.
화자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할머니"를 등장시킨다. 할머니는 아침해가 아니다. 긴 삶의 하루를 건너온 저녁 해이다. 할머니가 저물도록 밭고랑에 앉아 김을 매고 있다. "자꾸 흘러내리는 햇빛을 고랑 위로 끌어올리고 있다"의 상징은 매우 놀랍다. "흘러내리는 햇빛"은 시간 혹은 생애를 의미한다. 할머니가 밭을 매는 것은 남은 시간과의 처절한 싸움이기도 하다. 그러나 "일몰"은 멈추지 않는다. 할머니의 그림자를 끌고 서산을 넘어가고 만다. "할머니가/ 돌멩이처럼 작아지고 있다"는 저녁 해와 할머니의 병치(竝置)가 눈에 아프게 잔영으로 찍힌다.
처음 등단시를 읽은 후 오래 챙겨 읽지 못한 박후식 시인의 시를 꼼꼼히 들여다보면서 어째서 이처럼 시적 사유가 깊은 시인을 시단에서 좀더 챙기지 못했을까 하는 반성이 앞섰다. 박후식 시인은 이 시집만으로도 오랜 각고가 헛되지 않았음을 스스로 인식하고 이제부터라도 시 쓰기와 아울러 좋은 시를 찾는 이들에게 폭넓게 읽히는 일에도 나서주기를 빈다. 오랜만에 "시"를 깨우쳐 준 박후식 시인께 뜨거운 경의를 바친다.
<손금>
박후식 시집
현대시 시인선28 (2005. 10. 30. 한국문연 발행)
해설 : 사유의 깊이와 시의 깊이 .....이근배(시인. 재능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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