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와 산문의 만남

<손금>의 골목과 울타리 ... 자작시 해설

warmdoctor 2008. 1. 17. 00:02
* 시집 <손금>의 골목과 울타리 *
                       풍경이 있는 마을
- 몇 갈래의 흐름 -
 

                                                                                        (박후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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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의 풍경도 다양하다. 저마다 살아온 여정과 생각하는 삶의 끝이 다르기 때문이리라. 어떤 시는 신선한 감성과 첨예한 지성으로 척박한 토양을 일깨워 주는가 하면, 어떤 시는 샘물처럼 맑은 감동으로 다가서기도 한다. 또 어떤 시는 삶과 우주의 원리를 노래하거나 그것을 놀라울 정도로 천착해 들어가기도 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이 선을 긋듯 서로 다른 구역을 미리 획정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것들은 서로 섞이거나 조화를 이루면서 하나의 시(시집)로 탄생한다. 다만 어느쪽에  무게가 더 기울어 있느냐는 좀더 통시적 작업을 통해 규명되어야 할 일이다. 시의 눈이 신선하다거나 또는 시를 조직하는 언어의 직조능력이 어떤 경지에 와 있다는 등의 수사는 그 다음의 문제다.

 

1.

 

  박후식의 시세계는 어디에 뿌리를 두고 출발하고 있는 것일까. 어디쯤서 "젖은 날개를 털며" 끝없는 비상을 시도하고 있는 것일까. 아무리 반문해도 쉬운 일이 아니다. 이는 역시 그런 분야의 전문가나 독자의 영역으로 남겨두어야 할 것 같다. 다만 몇 가닥의 갈래를 찾아 "사유의 마을" 밑을 흐르는 수맥을 정리해봄으로써 시의 이해에 한 단추가 되었으면 한다.

  첫째는 잃어버린 것에 대한 지극한 내면의 그리움이다. 시는 어쩌면 그런 깊은 곳에 내재한 그리움에 뿌리를 두고 출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보자. 유소년의 나이에 6.25라는 엄청난 전쟁을 경험했다면 그 때의 기억이 가슴 한곳에 깊은 달빛을 긋고, 평생을 개울물처럼 삶의 내면을 흐르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깊은 곳으로 밀어넣으려 하면 할수록 새어나오는 불가사의, 때로는 달빛이 되고 때로는 풀잎 이슬이 되어 가슴을 후벼왔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 아픔이 여러 편의 시에서 묻어나오고 있다.

 

       산과 산 사이

       마을과 마을 사이에서

       풀꽃으로

       피어난 아이,

 

       전쟁이 앗아간 도시의 변두리에서

       피폭된 교각

       구멍 뚫린 바람 앞에서

       노을을 주어 담던

       너는 가난한 아이가 아니더냐.

 

       해 저문 달구지처럼

       넘어졌다가 부서졌다가

       어느 날 별똥별처럼 떨어져나간 슬픈 이야기,

       밤이면 숲 속을 헤매다가

       하얗게 꺾인 진을 들추어 보이다가

       갈라진 논바닥

       상처뿐인 격랑의 아픔을 보듬도

 

       아, 어머니의 고향

       감나무, 장독대, 달빛, 개똥밭

       오늘은 그 토방에 맨발로 서서

       한 자루 몽당연필로 서서

       생각하면 내 어릴 적 초승달 같은

       사색의 먼 언저리

       우리는 모두 경계인이 아니더냐.

 

-<경계인> 전문

 

  이 시는 6.25로부터 받은 한 아이의 이야기가, 붉게 타들어가는 노을의 모습으로 조명되고 있다. 그것은 한 아이만의 과거가 아니다. 시대와 사회로부터 보호받지 못한 아이, 전쟁과 이념이라는 거대한 덩어리 앞에 어쩔 수 없이 비굴해야 했던 우리의 자화상이 창문을 깨고 들어서고 있다. 그래서 "피폭된 교각/ 구멍 뚫린 바람 앞에서/ 노을을 주어담던/ 너는 가난한 아이가 아니더냐"고 스스로에게 묻고 있다. 너는 누구인가. 많은 아이들이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천막공부를 했다. 그 아이들이 자라 산업 일꾼이 되고 민주화의 흐름이 되고, 학자가 되고 지성이 되었다. 그들을 누가 감히 약자라 하겠는가.

  다음을 더 보자. "해 저문 달구지처럼/ 넘어졌다가 부서졌다가/ 어느 날 별똥별처럼 떨어져나간 슬픈 이야기"로 이 시는 한 고비를 맞고 있다. 여기서 "슬픈 이야기"는 또 무엇일까. 건너서는 안 될 강을 건너서일까. 지성의 파괴에서 오는 눈물일까. 인간의 이상이 시대적 잣대로 재단되고 분쇄된 아픔의 통한일까. 이 모든 것이 "갈라진 논바닥 상처뿐인 격랑의 아픔"이 아니겠는가.

  끝 연에 와서는 모든 것을 어머니(고향)의 가슴에 묻고 있다. 회오와 그리움이 짙게 감춰져 있다. 그리고 고향의 동구 밖에 서서 긴 세월을 되돌아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면 내 어릴 적 초승달 같은/ 사색의 먼 언저리/ 우리는 모두 경계인이 아니더냐"고 한 세대를 살아온 공동의 아픔을 역설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우리 시대의 아픈 산물인 "경계인"은 언제까지 국적없는 낭인으로 남아 있어야 할 것인가.

  잃어버린 것은 그뿐이 아니다. 잃어버린 것 속에 내재한 아픔을 <마량 앞 바다>를 통해 더 들어보자. 누구에게나 유년은 그만의 "풍경"으로 남아 있다. 유년이라는 돌이킬 수 없는 공간 때문에 조금은 낭만적이고 회화적인 일면을 갖고 있다. 그러나 "어느 해 여름이던가/ 강둑을 뒤덮던 무심한 유탄들이/ 산과 바다의 가슴을 향하고..."에서는 처절했던 당시의 모습을 상기시켜주고 있다. 마량은 전남 강진군 남단에 위치한 작은 포구이다. 이 포구를 건너면 완도군 고금과 이어진다. 6.25때  이 강(바다)을 사이에 두고 석 달 남짓 전쟁이 오갔다. 유년에 느낀 전쟁의 모습은 무섭기보다는 또 다른 이국적(異國的) 호기심으로 다가서기도 했다.

 

       마량에 와서 보면

       언제나

       충만한 바다,

       강폭(江幅) 같은 푸른 바다가

       나의 유년을 담고 있다

 

       어느 해 여름이던가

       강둑을 뒤덮던 무심한 유탄들이

       산과 바다의 가슴을 향하고

       전쟁은 마을 앞 느릅나무

       새들은 그렇게 떨어져 내렸다.

 

-<마량 앞 바다>의 부분

 

   지금 생각하면 어려웠던 과거가 주막집 등불처럼 느껴지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가난했지만 함께 나누고, 사랑방에 모이면 야학을 한답시고 누구라 할 것 없이 떠들어대던 친구들이 새벽별처럼 떠오른다. 조금 나이가 있던 친구들은 그때 지리산으로 끌려가 지금껏 소식이 없다. 그래서 다음 연은 "어디쯤 가 있을까/ 바닷가 산모퉁이를 돌아/ 저문 강둑에 서면/ 별들은 다시 수면 위에 떠오르고..."라고 회고하고 있다.

  위의 시들은 전쟁이라는 거대한 메카니즘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 메카니즘 뒤에서 밟히고 찍힌 수많은 인간과 잃어버린 지성의 아픔, 그리고 회복할 수 없는 그리움이 그 안에 담겨 있다.

 

2.

 

   두 번째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다. 누구에게나 고향은 소중한 기억과 자산으로 남아 있다. 고향과 고향을 상징하는 많은 것들이 우리의 가슴을 안으로 감싸고 있다. 이것은 고향만이 갖는 특별한 이미지요 너그러움이다. 특히 어린 시절의 고향은 고추잠자리처럼 하늘을 맴돌다가 금방 어디론가 사라지곤 한다. 그래서 고향은 늘 아쉬움의 하늘로 남는다. 고향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시는 누구에게서나 볼 수 있는 자연스런 현상이다. 그리고 "고향" 하면 많은 것이 생각되지만 그런 것들 속에 묻어오는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잊을 수가 없다. 어머니가 바로 그런 고향의 총체적 모습이기 때문이다.

        

       손금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숲 속을 흐르는 물소리가 들린다

       물소리는 깊은 계곡의 돌틈을 빠져나와

       마을 앞 개울소리가 되었다가

       밤새 둠벙을 푸는 아이들 소리가 되었다가

       새벽녘 산등을 내리는 바람소리가 된다

 

       손금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대숲으로 둘어싸인 산마을이 보인다

       골목 틈새로 새벽 쇠죽을 쑤시는 어머니와

       부지깽이 소년도 보인다

       감나무에 걸린 하현달도 거기 있다

       6.25 때 함께 도강하던 그 새벽달이다

 

-<손금> 전문

 

   위 시에서 보듯이 고향의 산과 들녘은 아름다운 추억으로 차 있다. 아무리 척박한 고향이라도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은 타고난 소성(素性)일까. <손금>은 그런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마을 앞 개울물처럼 깊은 회억 속에 담겨져 있다. 즐거운 일이나 슬픈 일들이 거기 함께 섞여 있다. 손금을 들여다보면서 "밤새 둠벙을 푸는 아이들"의 덤벙대는 소리에 깊은 향수를 느끼곤 한다.

  시인은 이 <손금>을 시집의 표제로 내놓고 있다. 조금은 망설였던 모양이지만, 삶의 시작이 거기 있고 삶의 끝이 거기에 가 있다는 생각에서다. 그 곳에는 넉넉한 들녘과 꼬불꼬불한 샛길이 함께 공존하고 있다. 그래서 대숲마을은 언제나 평화롭고 포근함을 전해준다. "골목 틈새로 새벽 쇠죽을 쑤시는 어머니와/ 부지깽이 소년도 보인다"에 와서는 돌아갈 수 없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노을 비낀 수수대 울타리처럼 비춰지고 있다.

 

       화분에 물을 주다보면

       아주 예날,

       한옥 생각이 난다

 

       난(蘭)

       때문일까

 

       어느 이른 아침

       안개를 밀치고 산봉(山峰)이 올라오듯

       냇가에 부딪던 햇살

       하얀 옷고름이 박꽃처럼 고왔다

 

       화분에 물을 주다보면

       난 잎에 흐르는

       미세한 눈물,

       마루 끝에 앉은 어머니 생각이 난다

 

-<화분> 전문

 

       어디쯤 가고 있을까. 미루나무 물 맑은 개울을 건너 참깨꽃 갓 피어난

       밭이랑을 지나, 옛날 물안개 피어오르던 선창 어린 것 바다 멀리 떠나

       보내고 워이워이 손을 흔들듯 그렇게 물보라 딛고 가고 있을까. 가다

       말고 한참을 산모퉁이에 서 있을까. 소나무 가파른 언덕 바다를 건너온

       물새처럼 흰 날개 펼치고 있을까. 어디쯤 가고 있을까.

 

-<사모곡> 전문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는 조심스럽다. 평생을 가슴에 묻고 살아야 할 지순의 꽃밭이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나 어머니는 사랑의 큰 산으로 자리하고 있다. 어릴 때나 나이가 들어서도 어머니의 사랑은 너무 크고 애틋하다. 어머니의 하얀 옷고름에 묻어나는 영롱한 이슬방울을 영원히 잊을 수가 없다.

   <화분>은 그런 어머니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난 잎에 흐르는 어머니의 옆모습을 오래도록 간직하고 싶어설까. "어느 이른 아침/ 안개를 밀치고 산봉이 올라오듯/ 냇가에 부딪던 햇살/ 하얀 옷고름이 박꽃처럼 고왔다"는 어쩌다 피어난 난꽃이 너무 예쁘고 고와서 어머니의 하얀 옷고름에 비유하고 만 것이 아닌가. 시인은 오랜 세월을 한옥에 산 모양이다. 한옥 마루 끝에 앉은 어머니의 슬프고도 고왔던 모습을 잊을 수가 없어설까.

   이에 비해 <사모곡>은 슬픈 이별가다. 아픔을 떠나보내는 아침 만가다. 어느 여름날, 집을 떠나 멀리 산을 찾아가는 어머니의 모습을 아련하게 그리고 있다. 아픔이 안으로 삭이어 밖이 잘 투시되지 않는다. 어렸을 적 워이워이 손을 흔들며 공부하러 떠나는 가난한 아들을 먼 뱃길 선창에서 손을 흔들어 떠나보내듯, 그때처럼 시인도 보내드리고 있다. 고향은 그리움만이 아닌 슬픈 향수도 함께 공존하는 그런 공간인가보다.

 

3. 

 

   세 번째는 소멸과 소멸 끝에 오는 정적(靜寂)에 대한 그리움이다. 소멸은 사라짐의 이미지다. 사라짐은 슬픔이요 그래서 또한 애틋한 그리움이 된다. 생성과 소멸은 언제나 하나의 선상에 있다. 생성의 끝에는 소멸의 잔상이 자리해 있고, 소멸의 내면에는 새로운 생성이 잉태하고 있다. 사물과 사물 사이,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소멸은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인가. 낳고 죽음이 이렇듯 생성과 소멸의 관계에 있다면, 인간의 생명은 어디에서 연유되고 어디에다 그 허물을 벗는 것인가.

  다음 시들은 소멸해가는 생명의 모습을 목탄화처럼 그려내고 있다. 죽음의 세계가 정적한 풍경으로 다가오면서 오히려 아름다움과 경건함으로 겹쳐지고 있다. 이렇게 사물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그것의 시원과 끝을 생각해보는 것은 시의 깊이에 보다 가깝게 접근해보는 일이 될 것이다. 많은 시인들은 삶과 죽음의 근거를 자연에서 찾아내고 자연을 통해 삶과 죽음을 동일한 이미지로 걸러냄으로써 이것들이 하나의 몸으로 연계되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소멸에 대한 그리움을 다룬 시로 <일몰> <집으로> <매미> <빈 창틀에 매달려> 등 많은 작품이 있다.

 

       산길을 가다보면

       돌 끝에도

       햇빛 앙금이 묻어 있다

 

       누가

       보냈을까

 

       산골 할머니가 밭고랑 끄트머리에서

       자꾸 흘러내리는 햇빛을 고랑 위로 끌어올리고 있다

 

       할머니가

       돌멩이처럼 작아지고 있다

 

-<일몰> 전문

 

  위의 시 <일몰>은 해질 무렵의 산골 풍경을 간명하게 그리고 있다. 군소리를 붙일 겨를도 주지 않는다. 다만 "산골 할머니가 밭고랑 끄트머리에서/ 자꾸 흘러내리는 햇빛을 고랑 위로 끌어올리고 있다"에서는 생명의 경외(敬畏)를 느끼게 한다. 얼마나 많은 세월을 퍼주기만 하다가 이제야 다 닳아진 목숨 위에 보토를 하듯 흙을 끌어올리는 것인가. 할머니가 돌멩이 속으로 빨려 들어가긋 일몰이 소멸을 데리고 지고 있다.

 

       집으로는 산길이다

       집으로는 삶의 형이상학이다

       집으로는 그리움이다

 

       집으로 가는 길엔 할머니의 마을이 있다

       집으로 가는 길엔 기다림이 있다

       집으로 가는 길엔 시와 산문이 있다

 

       집으로는 버리며 가는 길이다

       집으로는 가다가 되돌아보는 길이다

       집으로는 그 종점에 핀 꽃이다

 

       산길이 할머니의 허리로 내려와 있다

       산 속에 안긴 동그란 무덤

       물소리와 바람소리가 할머니의 가슴에 들어와 있다

 

-<집으로> 전문

 

   <일몰>에서처럼 <집으로>도 할머니가 무대의 중앙에 나와 있다. 그러나 할머니는 조명의 그늘에 가려 있다. 조명 뒤에서 할머니가 무색의 웃음을 보내고 있다. 무색의 웃음은 어디에 닿아 있을까. 첫연을 보자. "집으로는 산길이다/ 집으로는 삶의 형이상학이다/ 집으로는 그리움이다"라고 처음부터 어법적 월권을 하고 있다. 이 모순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우선 "집으로"가 갖고 있는 명사적 베일이 벗겨져야 한다.

  그래서 시집 본문에는 "집으로"에 *표를 하고 영화 "집으로"에서 시의 바탕을 가져왔음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집"이 갖고 있는 상징적 의미이다. "집으로" 안에 들어 있는 '집'에 대한 해석이 없고서는 또 한번 모호함에 직면하게 된다. 집은 현존하는 집이기보다 삶의 끝에 그려져 있는 집(무덤)을 상정하고 있다. 그래서 "집으로는 버리며 가는 길이다/ 집으로는 가다가 되돌아보는 길이다/ 집으로는 그 종점에 핀 꽃이다"라고 죽음의 세계와 마주하게 하고 있다. "집으로"는 삶과 죽음과 자연을 한 몸으로 연결함으로써 죽음의 세계를 생소하지 않게 하고 있다. 오히려 현재의 삶을 견건한 모습으로 되돌아보게 하는데 기여하고 있다.

 

       하필이면 창가에 날아와 우는 매미가 있다.방충망 모서리에 날카로운 발톱을

       밀어넣고 옹골진 자세로 운다. 유배당한 것일까. 매미는 푸석거리는 소리에

       놀라 금세 울음을 그친다. 까만 눈망울이 가을 하늘을 담고 있다. 돌아갈 항로

       를 생각하는 것일까. 몸이 부서지도록 고공의 끝을 향해 날아갈 아름다운 귀로,

       그 처연한 낙하의 순간을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매미> 전문

 

   <매미>에서도 청정한 하늘만큼이나 그 안에 숨어 있는 소멸의 아픔이 짙게 담겨 있다. 매미는 땅 속에서 애벌레 생활을 보통 2,3년 많게는 6년 이상을 하다가 여름이면 세상에 나와 15일에서 20일쯤 살다가 죽는다고 한다. 산이나 동네 나무숲에서 울어야 할 그런 매미가 아파트 거실 방충망에 날아와 울고 있다. 뭐가 원통해서인지 옹골지게 운다. "이것 봐라" 하고 고개를 들면 금세 울음을 그치고 긴장의 바다 속으로 함몰하고 만다.

  시인은 매미의 눈망울 속에서 얼마 남지 않은 여름 하늘을 보고 있다. "몸이 부서지도록 고공의 끝을 향해 날아갈 아름다운 귀로, 그 처연한 낙하의 순간"에 와서는 시의 긴장도를 한껏 높이고 있다. 말하자면 "고공의 끝"은 무변한 소멸의 공간이요, "처연한 낙하의 순간"은 삶과 죽음의 경계가 아니겠는가. 삶과 죽음과 자연이 서로 다른 세계가 아니라 하나의 공간임을 이 시에서도 보여주고 있다.

  

   이렇듯 박후식의 시세계는 생성과 소멸이라는 근원적 바다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리고 그 바다에는 사랑과 그리움이라는 인간적 아픔을 함께 담고 있다. 사랑이 인간의 원초적 삶의 근거라면 그리움은 인간의 삶에 대한 끝없는 아픔의 반추이다. 박후식의 시에는 이러한 인간의 사랑과 아픔이 바다의 내면을 이루고, 다른 한편으로는 소멸의 정적에서 오는 간절한 그리움이 그 저변을 형성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