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전당 시인선 148
흐르는 강 박후식 시집 (2013.02.12)
[시인의 말]
누군가 그리울 때가 있다.
그럴 때는 역(域) 너머
안개 속 미루나무를 응시한다. 비로소 거기
우리의
둥지가 있음을 본다.
‘역(域)’을 넘어서는 방식 - 순환 사유의 시적 가치
[해설] (백인덕·시인)
모든 ‘시’는 주제나 정서, 표현방식 등에서 개별적인 독창성을 갖는다. 바꿔 말하면, 시적 형상화의 산물인 개별 작품들은 ‘시적 자아’와 ‘시적 대상’의 관계에서 그 작품에서만 유효한 특수한 방식을 형성하게 된다. 만약, 시적 주체(자아)가 특정한 대상과 맺는 관계 즉 외적으로는 시·공간의 변화, 내적으로 지향성과 가치관의 변화에 무관하게 고착(固着)되어버린다면, 인류의 시 쓰기는 이미 오래전에 그 동력을 다 소진해버렸을 것이다. 이때에도 물론 ‘읽기(재해석)’의 가능성은 남아, 시인이란 오직 창조자가 아니라 감상자로서 그 명맥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가만 생각해보면 이런 영도(零度)의 고착이 불가능한 이유는 자아와 대상의 ‘관계항’에서 자아는 늘 유한(有限)하며, 그 유한성 속에서마저도 흐름을 멈출 수 없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박후식 시인의 시집, 『흐르는 강』은 제목에서부터 강력하게 앞의 사실을 환기한다. 시인은 몇 년 전 발간한 첫 산문집에서 “나는 오늘도 달리고 있다. 다른 사람 눈에는 그것이 무슨 달리기냐고 할지 모르지만, 나는 끝없이 나의 공간을 달리고 있다. 때로는 아름다운 숲길을, 때로는 뉘엿뉘엿 저물어가는 바다 저쪽으로 마냥 달리고 있다.”(「아름다운 질주」)고 고백한 바 있다. 이번 시집과 산문집을 아울러 소박하게 ‘시인의 초상(肖像)’ 한 장을 그려볼 수 있다. 시인의 사유, 혹은 시적 지향은 정주(定住)보다는 질주(疾走)를 꿈꾼다. 따라서 그의 정서는 언제나 아쉬움과 그리움이 교차되는 지점에서 더 또렷하게 영근다. 그 결과 표현은 시인의 자아를 억지로 기입(記入)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의 소리를 읽어내는 것, 즉 ‘교감(交感)’을 통해 획득되는 특징을 지닌다.
살다보면 속보이는 사람 말고
속없이도 그냥 아름다운 사람 어디 없을까
허물이 있어 더 귀한 사람 그런 사람 없을까
윗가지만 챙기는 사람 말고
목이 좋아 목을 지키는 사람은 더 말고
바보처럼 살아가는 울타리 같은 사람
그런 사람 어디 없을까
-「어디 없을까」 전문
지향하는 세계상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시가 결국 인생(자아)과 세계(사회와 현실)와 자연(우주)에 대한 창조적 이해의 산물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더불어 모든 시가 그 기원에서부터 ‘주관적, 심리적’ 기제에 의지하고 있음을 이해한다면, 다른 이해보다도 자기 이해가 모든 시작 활동의 중심에 놓일 수밖에 없음도 자명하다. 따라서 한 시집의 전체적인 면모를 그려보기 위해서 자아→ 세계(공동체, 시대)→ 자연(우주)으로 시각을 이동하면서 사유를 확장하는 방법이 가장 자연스러울 것이다. 박후식 시인의 이번 시집, 『흐르는 강』도 이 방법으로 충실히 감상이 가능하다. 다만 이 글에서는 편의상 순서를 바꾸고자 한다. 하지만 시인의 순환적 사유가 거의 모든 작품에 녹아 있으므로, 시간적 거리의 원근이나 공간적 규모의 크기는 그리 문제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박후식 시인의 『흐르는 강』은 자아와 대상 간의 긴장을 놓치지 않으면서 고향으로 대변되는 인간의 원초적 향수를 ‘자아-사회-자연’이라는 층위에 구애받지 않고 형상화하는 시적 가치를 드러냈다. 뿐만 아니라, 시인의 순환적 사유가 그 어떤 철학이나 종교에 의지하기보다는 시인의 자연체험을 통해 발바닥에서 귓속까지 몸으로 깨닫고 또 그렇게 시적 자산(資産)으로 변화시켰다는 데에 큰 의미를 둘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다음의 작품처럼 시인의 목소리가 ‘동시대’의 경종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시집은 큰 미덕이 될 것이다.
[추천글]
박후식 시인의 이번 시집 『흐르는 강』은 “속없이도 그냥 아름다운 사람”(「어디 없을까」)의 순정(純情)한 눈물로 쌓아 올린 탑(塔)을 보는 듯하다. 맑은 영혼과 심성이 아니면 볼 수 없는 풍경의 무늬들로 이뤄진 이 탑(塔)으로 인해 나는 불안했고, 즐거웠으며, 부끄러웠다. “혼자 눈물 밥을 먹어본 사람”(「눈물 밥」)이라면 분명 이 투명하고 눈부신 탑의 기원(祈願)을 눈치챌 수 있으리라. 그리고 “혼자 눈물 머금고 떠 있으면서도/내색하지 않는”(「달빛여행」) 법을 터득할 수 있을 것이다.
- 고영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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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후식 시집/ 흐르는 강/
ISBN 978-89-98096-13-7 03810/ 바코드 9788998096137
펴낸곳 문학의전당
[출처] [148] 흐르는 강/ 박후식 시집|작성자 시인동네
---- 아래는 [ 광주일보 ] 기사 내용 입니다.
자아의 심상, 독특한 울림
박후식 시인, 시집 '흐르는 강' 출간
2013년 03월 06일(수)
“한없이 젖어드는 또 다른 슬픈 얼굴이/ 강물 위에 섞여 저리 흐르는 것은/ 오랜 세월 다지고 굽이치면서/ 버릴 것 다 버리고/ 사랑의 유속으로 저리 흐를 수 있는 것은/ 또 누구의 눈물이랴…” (‘흐르는 강’ 중에서)
1978년
광주일보 신춘문예와 ‘
한국문학’
신인상으로 등단한 박후식(79) 시인이 시집 ‘
흐르는 강’ (문학의전당)을 펴냈다. 지난 2008년 ‘그녀의 집에는’ 발표 이후 네 번째다.
표제작 ‘흐르는 강’에는 대상을 바라보는 자아의 심상이 오롯이 담겨 있다. 화자의 섬세한 감정이입은 ‘고임’을 넘으려는 시적 지향과 맞물려 독특한 울림을 준다.
해설을 쓴 백인덕 시인은 “그의 정서는 언제나 ‘아쉬움’과 ‘그리움’이 교차되는 지점에서 더 또렷하게 영근다”면서 “그 결과 ‘표현’은 시인의 ‘자아’를 억지로 기입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의 소리를 읽어내는 것을 통해 획득되는 특징을 지닌다”고 말한다.
‘흐른다’는 시어가 환기하는 것은 순환과 재생이다. 철학이나 종교적 이념이 아닌 시인의 자연체험에서 비롯된 수사다. 궁극적으로 시를 향한 시인의 열망과 원초적 그리움은 ‘흐름’으로 귀결된다.
“누군가 그리울 때가 있다. 그럴 때는 역(域) 너머 안개 속 미루나무를 응시한다. 비로소 거기 우리의 둥지가 있음을 본다.”
박씨의 서정적 감성은 대상과의 관계를 통해 새로운 의미로 확장된다. 그 기저에는 타자와 교감하고자 하는 내밀한 목소리가 배어 있다.
박씨는 고흥여중·화순중 등에서 교장을 역임했고, 한국문인협회·한국시인협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지난 2005년에는 광주문학상 (詩부문)을 수상하기도 했다.
/박성천기자